2009년 10월 14일 수요일

[체험기] 영어학습기 체험해보니

보기만 해도 단어가 쏙쏙? 쏟아지는 영어학습기 효과는 과연…
무료체험 신청하자 "일단 결제하라"… 주민번호도 요구
단계별 단어선정 기준 애매, 발음·해석에도 허점 많아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76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한 시간에 1200단어가 내 것!”
“영어 고민 끝… 원어민과의 대화가 즐겁다”
“초등부터 직장인까지 신개념 영어학습기”
“공부방법의 새로운 혁명! 특허받은 ◇◇돌풍”
“아침·저녁 30분! 듣기만 하면 한 달 만에 귀가 뚫려”

요즘 신문을 펼쳐들면 하루가 멀다하고 이런 슬로건을 접할 수 있다. 이른바 ‘영어학습기’ 제조업체들이 내보내는 광고문구다. 이들 광고는 대부분 연예인과 영어강사 등 유명인을 모델로 내세운 데다 1개 면을 전부 차지하는 전면광고 형태를 띠고 있다. 일부는 인터뷰 기사 형식을 빌려 일반인의 체험 사례를 빼곡이 싣고 있다. “언론에서 (우리 제품을) 격찬했다”며 특정 매체의 이름과 게재일을 소개해놓은 종류도 있다. 여러 모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브랜드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영어학습기의 용도는 대동소이하다. ‘빠른 시간에 많은 단어를 암기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1분에 몇 개’ ‘1시간에 몇 개’ 하는 식으로 구체적 데이터를 제시하는 유형, ‘활발한 두뇌활동을 촉진해 자연스럽게 학습이 되는 시스템’이라며 뇌과학을 동원하는 유형, ‘국제대회에서 연구논문이 정식으로 발표돼 국제적으로 공인 받은 프로그램’이라며 권위에 기대는 유형 등 온갖 광고방법이 총동원된다.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자사 제품을 활발히 광고하는 (유사)영어학습기 업체는 줄잡아 10여개. 대부분의 업체가 짧게는 하루, 길게는 열흘까지 일명 ‘무료체험기간’을 주고 “사용해본 후 구매를 결정하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주간조선은 그중 상대적으로 노출빈도가 높은 2개 업체를 골라 무료체험을 신청해보기로 했다. 해당 분야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A업체, 유명 영어강사를 모델로 등장시켜 화제를 불러일으킨 B업체를 각각 대상으로 정했다.


무료체험 신청

‘문의 많다’ ‘주문 폭주’ 수차례 강조
20만~40만원… 결제해야 체험 가능

지난 9월 14일 오후 5시경 A업체의 무료체험 신청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현재 상담원이 모두 통화 중입니다. 통화가 끝나는 대로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자동안내음이 한참 흘러나오더니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네, 고객님. 광고 보고 전화 주셨죠? 전화 끊고 기다리시면 저희가 이 번호로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상담원 △△△였습니다.” 자신을 ‘상담원’이라고 밝힌 여성은 이쪽에서 무슨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자기 할 말만 하더니 이내 전화를 끊었다.

5분쯤 지나자 회신전화가 왔다. 좀전에 통화했던 이와는 또 다른 여성이었다. “고객님, 좀전에 저희 쪽으로 문의전화 주셨죠? 제품 신청이 폭주해서 받으실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세요.” 7일 무료체험을 신청하고 싶다고 했더니 상담원은 대뜸 ‘가격 안내’에 들어갔다. “가격은 36만원이시고요. 단어 2000개 암기하는 데 두 달이면 충분하세요. 그래서 특허도 받은 거예요. 쉬운 단어부터 어려운 단어까지 단계적으로 수록돼 있으니 참고하세요. 초보자는 50자씩 끊어서 암기하시면 돼요. 제품 받으시면 그 안에 학습요령도 포함돼 있으니 읽어보세요.”

상대편의 말을 거의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얘기하는 방식은 첫 통화 때와 거의 똑같았다. “3~4일 정도면 체험용 제품을 받을 수 있다”던 상담원은 자연스럽게 ‘결제’ 얘길 꺼냈다. “제품 받아보시려면 신용카드 전산승인이 필요해요, 고객님. 어떤 카드든 무이자 3개월 혜택 드리니까 필요하시면 나중에 이용하시면 되고요.” “무료체험이라면서 무슨 승인이요?” “아, 그냥 승인만 되는 거예요. 어차피 카드대금 결제되려면 시간 걸리잖아요. 제품 반납하시면 10원짜리 하나 안 빠져나가요. 신용카드번호와 유효기간이 어떻게 되시죠?”

‘[3개월. 승인] 360,000원 BC(****) 최혜원님 09/14 18:15 (주)△△△’ 한 시간여 만에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업체 측이 ‘나중에 이용하면 된다’던 3개월 무이자 혜택까지 친절하게 선택해 결제를 요청했고, 카드회사가 그 요청을 승인했다는 통보였다. 처음 문의했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먹통이었다. 카드사 측은 “해당 업체가 결제요청을 철회하지 않는 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설명만 되풀이했다. 이튿날 어렵게 연결된 전화에서 상담원은 아무렇잖게 “제품 반납하면 돈 나갈 일 없으니 걱정 말고 써보시라”고 말했다.

A업체와 비슷한 시각에 역시 신문광고에 나와 있는 B업체의무료체험 신청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계신 곳의 지역번호와 우물정(#)자를 눌러주세요.” 자동안내음에 따라 서울 지역번호를 눌렀더니 잠시 후 상담원과 전화가 연결됐다. 실제로 통화가 이뤄지기까지의 과정은 A업체와 거의 똑같았다. 광고 보고 전화했느냐, 지금 문의전화가 많다, 전화 끊고 기다리면 연락 주겠다…. A업체에서 걸려온 전화를 먼저 받느라 한 통의 전화를 놓치고 5시40분쯤 두 번째 전화가 걸려왔다.

B업체는 A업체와 달리 무료체험 요청의 전제조건으로 신용카드 승인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성명과 주민등록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왜 주민등록번호까지 알려줘야 하느냐’고 묻자 “실명 확인용일 뿐 다른 용도로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으며 알려준 주민등록번호는 상담원도 볼 수 없도록 특별처리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상담원이 알려준 배송예상 기간은 3~4일, 7일간 써보고 반품할 경우엔 반품 택배료 2000원을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성능

대·소문자 혼동… 원어민 발음도 곳곳 누락
Although 뜻이 ‘여전히 토익이 좋아하는 접속사’?


제품을 먼저 보내온 것은 B업체였다. “3~4일 걸린다”던 설명과 달리 전화상담한 지 이틀 만인 16일 오후 4시경 택배가 도착했다. B업체의 영어학습기 b는 예상보다 작고 가벼웠다. 액정은 흑백이었고 액정 주변을 빙 둘러가며 4~5개의 버튼이 설치돼 있었다. 본체와 사용설명서, USB 잭, 이어폰 등 내용물도 단출했다. AAA 사이즈 건전지 1개를 넣거나 USB 잭으로 컴퓨터와 연결하도록 돼 있었다. 전원을 켜니 ‘기능선택’ 화면이 켜졌다. ‘암기학습’과 ‘음성녹음’ ‘MP3 재생’ 등 크게 세 가지 기능으로 구분돼 있었다.

‘암기학습’ 폴더는 ‘STUDY’ ‘한자 1~8급’ ‘TOEIC’ ‘TOEFL’ ‘TEPS’ ‘필수 중국어’ ‘필수 일본어’ 등의 세부 폴더로 나뉘었다. ‘STUDY’는 초·중·고 영단어를 단계별로 쪼개어 학년당 적게는 수십 개에서 많게는 수백 개까지 수록해놓았다. 단어 수준을 확인하기 위해 ‘초등영단어 1-1’ 폴더를 열었다. ‘the-그(정관사)’ ‘a-하나의’ ‘and-그리고, ~와, ~과’ ‘you-너는, 당신은’과 같은 단어(해석)가 2~3초의 간격을 두고 순서대로 점멸했다. 영단어가 제시될 땐 내장 스피커를 통해 원어민의 발음도 함께 들렸다.

그러나 b 영어학습기의 논리에 따르면 가장 먼저 익혀야 할 영단어가 수록돼 있어야 할 이 폴더 속 단어의 캡션은 ‘영어 초보자’가 익히기엔 상당히 비체계적이었다. ‘is(6번째 단어)’는 ‘be의 3인칭(단수 현재)’으로, ‘are(8번째 단어)’는 ‘be의 2인칭현재(단·복수 사용)’로 설명한 후 다시 ‘be(29번째 단어)’를 ‘~이다(be동사 원형)’로 소개하는 식이었다. ‘see’를 ‘~을 보다, 만나다, 알다’로 설명한 후 곧이어 제시된 ‘know’도 ‘알다,  알고 있다’로 설명해 초등생이 두 단어의 의미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듯했다.

각 폴더에 속한 단어들에서 일관성을 찾기도 어려웠다. 예컨대 ‘중1 영단어 1-1’의 경우, ‘south(남쪽)’는 있었지만 ‘east(동쪽)’나 ‘west(서쪽)’ ‘north(북쪽)’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six(여섯의, 6, 여섯)’와 ‘eight(8, 여덟, 8의)’는 눈에 띄었지만 나머지 숫자를 뜻하는 단어는 없었다. 수많은 도시명 중 왜 유독 ‘London’만, 서수 중엔 왜 ‘third’만 수록됐는지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품사 표시가 따로 돼 있지 않아 한 단어가 여러 품사로 사용되는 다품사 어휘를 구분하는 작업도 학습자 입장에선 버거워 보였다.

토익(TOEIC) 폴더는 관련 단어가 주제별로 구분, 제시돼 있었다. ‘경제’ 폴더에 수록된 단어는 총 32개. 이 부분에선 좀 더 심각한 결점들이 발견됐다. 일단 대문자와 소문자를 혼동한 표현이 많았다. 폴더를 열자마자 ‘Bankruptcy(도산 파산)’ ‘Bankrupt(도산한, 파산한)’ ‘Boom(반짝경기, 붐)’ ‘Brisk(활발한)’ ‘Capital(자금, 자본)’ 등 첫 글자를 이유 없이 대문자로 표기한 단어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또한 ‘overconsumption (과소비)’이나 ‘trade deficit(무역수지 적자)’ 등 상당수의 표현에서 원어민 발음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았다. 가장 황당했던 건 ‘R&D’가 제시됐을 때. 원어민발음(‘래드’)도, 뜻(‘연구와 투자’)도 엉터리였다.

이어 찾아본 ‘무역’ 폴더 역시 허점투성이였다. 첫 단어 ‘barter’에 ‘(구상 무역) 방식도 있다’는 이상한 설명이 달리더니 이후 동일한 단어가 ‘물물교환 구상무역’이란 설명으로 다시 제시됐다. 이곳에서도 원어민 발음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표현이 태반이었다. ‘상업통신문’이라고 설명한 ‘business correspondence’의 경우, ‘비즈니스’만 발음됐다. ‘FOB(본선인도)’는 ‘파브’로 발음되기도 했다. 30여개 단어 중 11개는 ‘initial order(첫주문)’ ‘additional order(추가주문)’ ‘small order(소량주문)’ ‘larger order(대량주문)’ 등 ‘order’가 포함된 명사(동사)구였다. 단어 선정기준이 의아해지는 대목이었다.

A업체의 영어학습기 a가 도착한 건 b보다 하루 늦은 17일 오후 4시50분경이었다. 택배기사로부터 받아든 종이상자가 묵직했다. 열어보니 본체와 함께 전화상으론 전혀 안내가 없었던 책자 4권이 함께 들어 있었다. 권당 50개씩, 총 200개의 단어를 마스터할 수 있는 워크북이라고 했다. 표지에 단계별 학습요령이 제시돼 있었지만 각 단계의 설명 중 일부가 겹치는 등 별로 미덥지 않았다. 슬쩍 들춰본 속지엔 오타도 눈에 띄었다. 책자 뒷면에 표기된 정가는 각권 1만3000원이었다. 4권이니 액면가로만 따지면 워크북 가격만 5만원이 넘었다.

a는 얼마 전까지 한창 유행했던 일본산 소형 게임기와 외형이 거의 흡사했다. 한가운데 터치스크린 형태의 액정이 자리잡고 오른쪽 상단 끝에 뽑아 쓸 수 있는 펜이 있는 것까지 똑같았다. b와 마찬가지로 USB 커넥터를 통해 PC와 연결해 사용할 수 있었고 충전도 가능했다. 스크린이 작고 버튼조작식인 데다 흑백이었던 b에 비해 여러모로 세련돼 보였다.

전원을 켜니 주기능인 단어암기 외에도 MP3, 전자책, 동영상 재생 등 여러 부가기능이 포함돼 있었다. 메모리카드를 별도로 구입해 끼워 넣으면 MP3 플레이어나 PMP로도 활용 가능한 구조였다. b보다 2배 이상 가격이 비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영단어 암기 부분은 여러 개의 세부 항목으로 구분돼 있었다. 초·중·고로 나뉘어졌던 b와 달리 레벨에 따라 단어 수준을 달리해 수록해놓았다. 토익이나 토플(TOEFL), 텝스(TEPS) 등 시험용 영어와 한자를 따로 나눠놓은 것은 b와 비슷했다. 사용자의 학습진도에 맞춰 맞춤식 단어장이나 회화장, 다운로드 단어집 등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게 한 점은 주목할 만했다. 모든 항목은 ‘학습’과 ‘테스트’ 탭으로 구분돼 있었다. 해당 단어를 공부한 후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구조였다.

‘TOEIC 실전’ 폴더를 클릭해 ‘학습’ 탭을 선택했다. 액정에 떠오른 이 부문의 총 수록단어는 1442개. 사용자가 번호를 선택해 학습범위를 지정할 수 있게 돼 있었다. 단어와 뜻이 제시되는 시간과 반복횟수도 조정 가능했다. 일단 100개의 단어를 ‘단어 2초, 뜻 1초’로 3회 반복하도록 설정한 후 재생 버튼을 터치했다. 알파벳 순으로 단어가 제시됐다. 비슷한 뜻은 쉼표로, 전혀 다른 뜻은 세미콜론으로 구분하는 등 단어 설명 부분은 b에 비해 한결 세심했다. ‘숨김’ 기능이 있어 아는 단어를 건너뛰고 암기할 수 있는 점도 학습자 입장에선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품사 제시가 없는 점이나 대·소문자가 혼동된 단어가 등장하는 점, 해석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점 등은 b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초 선택했던 100개의 단어 중 후반부로 갈수록 관용어구가 자주 제시됐는데 알아두면 유용할 것 같은 표현도 있었지만 ‘unless the items are particulary small(제품이 특별히 작지 않다면)’처럼 왜 꼭 토익 실전단어로 꼽혔는지 알쏭달쏭한 표현도 있었다.

‘earn a reasonably good wage’를 ‘상당히 좋은 봉급을 벌다’라고 해석한 부분은 ‘상당히 괜찮은 급여를 받다’로 고치는 게 훨씬 자연스러워 보였다. 제일 거슬렸던 부분은 ‘Although’였다.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한 것도 이상한데 기기가 제시한 이 단어의 뜻은 이랬다. ‘여전히 토익이 좋아하는 접속사!’


반품 과정

‘7일 무료체험’ 6일 만에 ‘종료’ 메시지
반품했는데도 신용카드 명세서 날아와


‘최혜원님 [영어학습기 7일 무료체험 종료 알림] 198,000원 농협 △△△-△△-△△△△△△’ 휴대전화 메시지가 온 건 22일 17시22분이었다. 발신은 B업체. 택배가 도착한 시각을 기준으로 하면 23일 오후가 돼야 일주일을 채우는 데 하루 이른 독촉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후 곧바로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반품하려고 한다”는 얘기에 상담원은 처음 무료체험 신청을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단 끊으면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말했다. 전화가 걸려온 건 전화를 끊은 지 10여분이 지났을 때였다.

080으로 시작되는 발신번호로 연락해온 상담원은 반품 사유를 한번 물어봤을 뿐 선선히 반품을 접수해줬다. 제품을 받은 당시 상태로 포장한 후 업체 측에서 보낸 택배기사에게 넘기고 택배료 2000원을 본인이 부담하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택배기사가 언제 올지 확답해줄 수 없다는 것. 상담원은 “정 못 미더우면 아무 택배나 이용해 물건을 보내고 송장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겠다고 말한 후 이튿날 오전 우체국 택배를 이용, 익일특급 우편으로 발송했다.

B업체와 반품 관련 통화를 끝낸 직후 A업체에도 전화를 걸어 반품 의사를 밝혔다. 상담원은 “본사로 연락해보라”며 전화번호를 하나 알려줬다. 전화를 받은 A업체 직원 역시 “제품을 받았던 주소로 택배비만 부담해 반송해주면 된다”고 말했다. 역시 23일 오전 B업체 제품과 함께 반송처의 주소로 보냈다. 그날 저녁 6시경, A업체 제품을 받을 당시 번호를 알려줬던 신용카드 명세서가 이메일로 도착했다. ‘a 영어학습기 대금 1회차분(12만원)이 10월 1일 결제된다’고 안내돼 있었다. 곧장 A업체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이튿날 전화를 받은 A업체 직원은 “제품이 우리 쪽에 도착할 때까진 전산승인이 유지될 수밖에 없다”며 “제품의 이상 유무를 확인한 후 승인을 취소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 기다리라”고 했다. “(승인이 취소되는 시점은) 10월 1일쯤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직원이 언급했던 10월 1일 명세서 통보내역대로 12만원이 빠져나갔다. 돈이 다시 입금된 건 10월 5일 오후 3시 20분경. 제품을 반납한 지 12일, 상담원이 승인 취소를 예고한 지 나흘이 지난 후였다.


영어전문가 2人이 본 영어학습기

“시대착오적 기계… 차라리 예문 충실한 소형 사전 써라”
“암기엔 효과적일지 몰라도 정말 회화에 도움될지 의문”

무료체험 기간 중 a, b 두 제품을 영어 전문가에게 보여준 후 자문을 구했다. 한 명은 모 여대 언어교육원장과 영문학과 초빙교수 등을 역임한 S씨, 다른 한 명은 대학교수 겸 영어사업가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C씨였다.

“아직도 이런 제품이 활개를 치다니 정말 시대착오적입니다. 기계 자체는 죄가 없죠. 중요한 건 콘텐츠예요. 껍데기가 아무리 좋으면 뭐합니까, 알맹이가 엉터린데요.” S씨는 최근 난립하는 영어학습기에 대해 상당히 강도 높은 비판을 제기했다. “(영어학습기 화면을 가리키며) 이것 보세요. abound를 ‘풍부한’이라고 외우게 하는데 그것만 알면 abound를 일상 회화에서 제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 단어의 용례를 모르고 냅다 암기해버리는 건 의사소통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결국 (영어학습기도) 장사꾼의 상술에 불과해요. 학교에서 검증을 했겠습니까, 관련 연구결과가 발표됐겠습니까?”

그는 영단어에도 두 종류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나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메시지/내용 단어(message/content word)’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보다 기능성이 강조되는 ‘구조/기능 단어(structure/ function word)’다. 전자의 경우 영어학습기가 내세우는 방식으로 암기하면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엔 백해무익할 뿐더러 오히려 공부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게 S씨의 주장이었다. 그는 “영어학습기로 공부하느니 차라리 예문이라도 충실하게 실려 있는 소형 영한사전으로 공부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단언했다.

S씨는 효과가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영어학습기 시장이 팽창하는 이유에 대해 “멀티미디어에 혹하는 요즘 학생들의 성향이 한몫한다”고 말했다. “우리 때만 해도 발음기호만 있으면 단어를 제대로 발음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 어린 세대는 어디 그런가요. 오디오로 들려줘야 알아듣습니다. 그런 학습자를 유혹하는 데 영어학습기만한 게 없죠.” 그는 “그 점을 감안해도 시판 중인 영어학습기 가격은 지나치게 높다”고 지적했다. “영어학습기가 그나마 제 몫을 하려면 제품 개발 단계에서 콘텐츠 전문가를 섭외해 상시적 업데이트가 가능하도록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게 이뤄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C씨는 S씨에 비해 다소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영어학습기로 하는 공부가) 단순 단어암기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날로그 방식의 암기와 비교하면 움직이는 영상을 보고 실제 소리를 들으며 공부할 수 있으니 시청각교육 측면에선 괜찮겠네요. 언어교육의 핵심 중 하나가 끊임없는 반복인데 영어학습기에 내장된 반복 기능이나 숨김 기능을 활용하면 그 부분에서도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는 “다만 외국어 교육의 최종 목표를 ‘대화체 영어의 자유로운 구사’로 봤을 때 개별 단어만 익히는 방식이 얼마나 도움이 될진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수준별 단어 선정에 일관성이 적은 점, 20만~40만원에 육박하는 제품 가격이 부담스러운 점 등도 문제로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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