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화요일

역사 속의 금빛 알갱이: 소금의 권력과 영향

인류가 처음 소금을 쓴 기원전 6천년 경부터 소금은 줄곧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대부분은 소금을 지배한 자가 곧 세상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은 아무도 귀 여기지 않는 이 작은 알갱이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큰 흐름을 따라가 봅니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소금 없이는 살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아기가 자라는 엄마뱃속의 양수는 0.9% 염분이 섞인 바닷물과 같습니다. 사람이 소금물에서 태어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몸에 70%를 차지하는 체액에도 0.9% 소금이 녹아 있습니다. 혈액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0.9% 염분 농도를 맞추지 못하면 우리 몸은 당장 큰 탈이 납니다.

수렵 시대만 해도 인간은 따로 소금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동물의 살과 피를 먹는 것으로 충분해서였습니다. 원시인들이 동물의 피를 즐겨마신 건 야만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너무나 귀중한 소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농경을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경작한 식물에 함유된 것만으로는 염분이 부족했기 때문에 따로 소금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금을 만들 수 있는 바닷가나 지대에 모여 살기 시작했습니다. 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소금 지대인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인류 최초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도시 국가들은 대부분 소금 거래의 중심지였습니다. 인류 최초의 도시라 불리는 '예리코'는 소금 호수의 대명사격인 사해 근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사례의 대표는 뭐니뭐니 해도 로마입니다.



위대한 천년 제국 로마도 그 시작은 미약하기만 했습니다. 로마를 흐르는 테베레강에서 염전을 하던 몇몇 사람들이 모여 시작된 게 로마였습니다. 최근 인플루엔셜 출판사는 세계를 바꾼 여섯 가지의 물질을 문명사적으로 다룬 책을 펴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초기의 소금은 그 어떤 것보다 식량을 보존하는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무엇이든 소금으로 절이면 부패를 오래 막을 수 있어서 소금은 생명의 물질로 여겨졌습니다. 로마의 상인들은 염전에서 나는 이 생명의 물질을 팔아 엄청난 돈을 벌었고 이게 로마의 건국 자금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확장은 곧 염전의 확장이었습니다. 로마는 염전을 뺏거나 새로 만들거나 해서 확인된 대형 제염소만 해도 60곳이 넘었습니다. 이 품질 좋고 값 싼 로마의 소금을 사기 위해 유럽 전역의 상인들이 로마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길이 만들어졌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습니다. 그 길이 바로 소금을 운반하던 소금길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금도 쓰는 여러 단어가 만들어졌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소금으로 봉급을 받았다 하여 샐러리가 나왔고, 그 병사를 가르치는 단어가 솔저입니다. 로마인들이 즐기던 소금의 절린 야채가 샐러드입니다. 로마를 제국으로 만든 것처럼 로마를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도 소금입니다. 1세기에 갑자기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로마는 부의 원천이었던 염전을 대거 잃었습니다. 이게 로마가 하락세로 접어든 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로마 이후에도 소금길은 세계로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그 중엔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을 북에서 남으로 넘는 길도 있었습니다. 북 아프리카의 유목민인 베르베르인들은 8세기에 소금을 실은 수천 마리의 낙타를 몰고 사하라 사막을 남쪽 끝의 도시 팀북로 원정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따라 들어온 건 소금만이 아니었습니다. 7세기의 혜성처럼 등장한 이슬람도 거대한 장벽인 사하라를 넘어 서남 아프리카로 들어왔습니다. 말리의 팀북투를 드나들던 이슬람 소금 상인들에 의해서죠. 팀북투는 이후 이슬람학과 모스크가 들어서며 아프리카 이슬람 학장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팀북투의 소금길은 아프리카의 금과 상아, 노예들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주요 루트가 되었습니다.

로마 멸망 후 로마와 비슷한 길을 걸은 도시가 있었으니 베네치아입니다.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던 베네치아는 7세기 들어 해수면이 낮아지면서 천일염 생산의 최적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갑자기 유전이 터진 거죠.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 소금을 파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지중해의 소금 시장을 전부 장악해 버렸습니다. 지중해의 소금을 독점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전쟁을 벌였죠. 그 결과 14-5세기엔 베네치아 교역량의 절반이 소금이었습니다. 또한 동방무역을 통해 도자기 등을 독점해 베네치아는 중세의 유럽의 최강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여행자들을 매료시키는 베네치아의 장엄한 건축물들과 화려한 조각품들이 대부분 이때 만들어졌죠. 오늘날에도 사용 중인 복식 부기와 근대적 의미의 은행도 소금 거래에서 나온 베네치아의 발명품입니다.



또한 피렌체와 함께 베네치아의 번영은 문화의 번성을 가져와 이게 결국 르네상스로 연결되었으면 현대 화학을 낳기도 했습니다. 중세의 연금술사들은 소금을 촉매제로 해 납을 금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물론 이런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금과 수운과 유황 등을 섞고 끓이고 분리하는 과정에서 현대 화학의 기초가 모두 만들어졌습니다. 

중세가 끝나갈 무렵 소금은 이번엔 보잘 것 없는 나라인 네덜란드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15세기 네덜란드는 100백만 인구 중에서 30만 명이 청어 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청어를 잡자마자 배에서 바로 소금으로 염장하는 방법을 개발해 냈습니다.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청어를 1년 넘게 보관할 수 있었습니다. 그덕의 조업 기간을 대폭 늘려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죠.



네덜란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갔습니다. 비싼 발트의 암염 대신 값 싼 스페인산 천일염으로 대체해 가격 경쟁력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쫓겨나 네덜란드에 자리잡은 유대인들이 최초로 불순물을 제거한 정제 소금을 만들었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당시라 소금에 절인 청어는 전 유럽에 불티나게 팔려 나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17세기에 네덜란드는 유럽 청어 시장의 절반을 장악했습니다. 이때 번돈이 나중에 네덜란드를 세계 곳곳의 식민지를 거느린 해상 제국으로 만들었으니 소금이 한국가의 운명 전체를 바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가 소금으로 부흥하면서 12세기부터 500년간 발트해와 북극해의 무역을 독점했던 한자 동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정제 소금을 만든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16세기 말 네덜란드 독립전쟁 때 스페인의 염전을 봉쇄해 스페인 국왕을 파산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게 스페인의 몰락으로 이어졌으니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수백년 만에 선조들의 복수를 한 셈입니다. 

소금은 혁명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바로 18세기 말의 프랑스 혁명입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어디나 소금의 세금을 매겼습니다. 소금을 먹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이만큼 손쉬운 세원이 없었습니다. '물질의 세계'라는 책에 의하면 가벨이라 불린 프랑스의 소금세는 정말 악랄했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8세 이상이라면 누구나 일주일에 한 번은 소금을 사야 했습니다. 그것도 왕이 마음대로 가격을 정하니 어떨 땐 원가의 20배가 넘기도 했습니다. 가벨 징수관은 수시로 집에 들이닥쳐 의무 소비량을 지키는지 감시하고 냈습니다. 무엇보다 프랑스인들을 화나게 한 건 가벨이 힘없는 민중들에게 의무라는 점이었습니다. 온가 특권을 누리던 귀족들은 이마저도 면제였습니다. 소금세는 프랑스 혁명을 촉발한 숨은 요소이기도 합니다.




소금을 두고 뺏고 빼앗기는 전쟁은 유럽에선 너무나 흔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남미에서도 심각한 소금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페루 앞바다의 친차 제도에 쌓인 구하노라는 새 똥을 두고서입니다. 수천 년간 화석처럼 30미터나 쌓인 이 구아노는 소금의 일종인 질산 칼륨 덩어리였어요. 이를 두고 칠레와 페루-볼리비아 연합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승자는 칠레였습니다. 패자 볼리비아는 태평양 전쟁이라고 불린 이 전쟁으로 바다를 잃고 내륙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구아노가 뭐길래 세 나라가 국운을 걸고 4년간이나 싸웠을까요. 실상 칼륨은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천연 비료였습니다. 게다가 화약 제조의 핵심 재료죠. 당시엔 부르는 게 값인 이 덕분에 칠레는 남미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빼앗은 땅엔 훨씬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리튬이 무한정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이 새똥은 남미의 전쟁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연합군은 칠레의 질산 칼륨으로 총알과 포탄을 만들어 독일군 진지에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독일 과학자들이 대기 중에서 질소를 분리하는데 성공했고, 독일군은 합성 질산염 포탄으로 반격을 가했습니다. 자연산 소금과 인공 소금이 맞붙은 이 무기로 전쟁은 장기화되고 그 전의 전쟁보다 더 심각해집니다. 결국 이런 전쟁의 결과로 소금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물질로 자리 잡았습니다.



소금의 이용은 역사와 문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소금과 문명의 역사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으며 이후의 소금의 가치 변화는 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현재에도 소금은 식품 보존뿐만 아니라 산업 분야에서도 중요한 자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과거의 문명들은 소금을 통해 부와 권력을 확보했고, 소금의 생산과 유통이 문화와 경제의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소금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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